문학

<외국문학> 도스토옙스키의 살아있는 문체, 카라마조프 형제들

마뜨료쉬까 2013. 4. 2. 20:06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Братия Карамазовы


도스토옙스키의 묘 (알렉산드르 수도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한복음 12장 24절)

엄청난 분량의 소설인 <카라마조프 형제들>을 모두 한 번씩 들어봤을 것이다.

책 맨 앞장을 열면 나오는 성경구절이며 또한 도스토옙스키의 묘지에 적혀있는 성경 구절이기도 하다. 말씀의 의미가 무슨 뜻 인지 이해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도스토옙스키는 왜 첫 장에 말씀을 써 놓은 것일까? 도스토옙스키에게 있어서 말씀과 믿음은 무엇일까? 오늘날 성경 말씀을 중심으로 글을 쓴다면 아무리 좋은 글이 나와도 환영받지 못할 주제이다. 기독교인들에게는 흥미로운 주제로 다가오겠지만 신앙을 갖지 않은 다른 독자들에게는 흥미로운 주제는 아니다. 현재 기독교의 권위는 언제부터인지 땅 바닥 아래로 떨어져 버렸고, 기독교인들의 행실에서는 선한 모습을 볼 수 없다고 한다.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 형제들>은 그리스도의 향기를 지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 형제들>은 다양한 독자들로부터 극찬과 사랑을 받고 있다. 도스토옙스키의 문체와 넓고 깊은 심리묘사그리고 인물들 간의 갈등의 상호관계는 책을 덮을 수 없게 만든다.

요한복음 1224절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정말 많은 복음이 온 땅에 퍼지게 됐다. 그 복음이 도스토옙스키에게 까지 전해지게 된 놀라운 그 일을 도스토옙스키는 기억했다. 



“사람들은 나를 심리학자라고 부르지만 나는 단지 더 높은 의미에서 사실주의자일 뿐이다. 즉 나는 인간 영혼의 모든 심연을 묘사한다.” 
- 도스토옙스키

열망이 만들어낸 작품

도스토옙스키의 놀라운 사상과 갈등 그리고 그의 열망이 담겨있는 작품 <카라마조프 형제들>을 읽어봤다면 도스토옙스키의 깊이 있고, 신비롭기도 하면서 너무 사실이고 솔직한 글을 만났을 것이다. 도스토옙스키의 문체는 어느 누구도 흉내 낼 수없는 묘한 글이다. '정말 이런 글이 나올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도 생긴다. <카라마조프 형제들>은 종교적인 이야기를 빼고도 할 이야기는 끝없는 작품이지만 도스토옙스키의 '예수'를 구현하고자 하는 열망을 배제하고서는 작품의 해설이 불가능 하다


젊은 시절 도스토옙스키는 폐트라셰옙스키라는 프랑스 사회주의 혁명가의 기록을 분석하는 서클에 가입하고 활동하게 되는데 당시 러시아 정부는 그 서클을 주의하고 있었다. 결국 도스토옙스키는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게 된다. 처형 5분을 앞두고 도스토옙스키는 3분은 가족과 친구들을 생각하면서 2분은 후회가득한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처형을 기다리는데 극적으로 러시아 황제의 사면으로 시베리아 옴스크에서 복역하게 된다. 수감 생활 중 어떤 여성에게 신약성경을 받게 되는데 도스토옙스키는 그때부터 계속해서 성경을 읽게 된다


그때부터 '예수'라는 진정한 진리를 만난 도스토옙스키는 '예수'를 구현하고자 글을 쓰기 시작한다죽음의 문턱 바로 앞까지 다녀온 도스토옙스키의 심리의 묘사는 무시무시하다신기한 사실이 있는데 철저히 기독교의 사상을 거부한 프리드리히 니체는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을 극찬했다. 도스토옙스키의 문체에서 나오는 표현력은 모두에게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길을 제시한다



15세기 다시 나타난 그리스도 그리고 이반과 대심문관을 살펴보다...

연필로 그린 도스토옙스키 (26살) 연필로 그린 도스토옙스키 (26살)

이반이 쓴 대심문관의 배경인 15세기는 르네상스 시대 무렵이고 또한 종교재판이 매우 활발하게 진행되던 시기였다19세기 러시아는 농노제가 폐지되었고 새로운 사회주의 사상이 퍼지면서 러시아 정교회의 권위는 무너지고 혼란스러운 시기를 보낸다. 당시 러시아의 지식계급은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였지만 혼란 속에서 민중들은 자해를 하거나 무신론에 빠지게 된다. 두 모습을 소유한 철저한 무신론자로 등장하는 이반은 대심문관에서는 예수와의 만남을 이야기하고, 또 그 이후에는 현실에서 악마와 만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반은 대심문관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약간의 서문을 이야기 한다. 박해자에게 억울하게 죽임당한 어린아이에 대한 눈물의 보상을 언급한다. 하지만 보상은커녕 어려운 고뇌만 주어지는 그런 '부조리 투성의 세상'을 이반은 인정할 수 없다 말하며 단언한다. 이반의 말은 굉장히 논리적이고 철학적이다. 이 서문을 오늘날과 비교한다면 흔히 볼 수 있는 시각적인 차이가 있는 기독교의 모순 대하여 이야기 할 수 있다. 무신론자들은 부조리를 이해할 수 없고, 기독교인들에게는 이해되고 받아드려지는 부조리한 상황과 사건들은 무신론자인 이반과 수습 수도사인 알료샤의 대립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인류의 눈물은 그전과 변함없이 그리스도를 원하고, 사랑하고, 기다리며 그에게 희망을 걸고, 옛날처럼 그를 위해 고난을 당하다 죽기를 열망했던거야. 이리하여 몇 세기에 걸쳐 인류가 신앙과 열정을 가지고 '오, 주여, 하루속히 우리에게 나타나소서' 기도하고, 오랜 세월 동안 애타게 그의 이름을 불렀기 때문에 끝없이 자비로운 그리스도는 마침내 이토록 기도를 드리는 사람들에게 내려오기로 했던거야" <카라마조프 형제들>중.. 


대심문관에서 그리스도가 다시 땅에 등장한 이유에 대해 나온다. 이 문장에서 보면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당하다 죽기를 열망했던'이라 나온다. 그들의 죽음으로 인류는 계속해서 신앙을 갖고 전파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신자들은 한 알의 밀알이 되어 결국 죽음으로 열매를 맺은 결과로 나온다. 오로지 그들을 위로하기 위해 그리스도는 기도하는 이들에게 다시 내려 온 것일까?

대심문관은 그리스도의 일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교회가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교회를 위해서 라면 그리스도의 일에 반대되는 일도 이행해야 한다는 부조리에 대한 의견을 제시한다.   



"그리스도는 사람들 눈에 뜨이지 않게 조용히 나타났지 그런데 이상하게도 모두가 주님을 알아본단 말이야. 여기가 내 서사시 중에서 최고의 장면 중 하나가 될 곳이지" <카라마조프 형제들>중..


노예 차림으로 등장한 그리스도는 사람들 앞에서 큰 자비로운 연민의 미소를 지으며 축복과 치유를 베푼다. 결국 종교재판을 행하던 대심문관에게 체포되고 심문을 받게 된다. 대심문관의 말은 대략 이렇다. '예수'가 황야에서 40일 금식기도를 마친 후 악마에게 3가지 유혹을 받았을 때 '돌을 빵으로 만들라, 절벽에서 뛰어내려 신비를 보여라, 악마에게 절하고 온 세계를 얻어라' 그 유혹들을 뿌리쳤다. 이것을 통해 사람을 먹을 것과 기적과 절대 권력으로 굴복시켜 노예로 만들길 원치 않았음을 보여줬다. 인간이 자유 의지로 당신을 믿기를 바랄 뿐이었다. 하지만 당신이 만든 인간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너무 높게 평가해서 15세기가 지난 오늘 결과는 기독교를 반대하는 반역자들의 탄생만 초래했다


황야에서의 40일 금식기도를 하던 그리스도의 모습은 어땠을까? 크람스코이의 작품 <황야의 그리스도>를 보면 뼈밖에 보이지 않는 손과 발 그리고 들어간 눈 보이지 않는 악마와 내적으로 대립하고 있다. '돌을 빵으로 만들어라', 이와 같이 빵의 유혹은 강한 것이다. 대심문관은, 사람은 먹을 것을 위해서라면 자유를 희생할 수 있으며 또한 표적과 기적 그리고 권위에 매달린다. 자유의지로 당신을 믿는 소수의 믿음을 소유한 사람들만 돌볼 것인가? 당신은 인간의 자유를 지배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그 자유를 더욱 부풀려 사람들에게 더욱 무거운 짐만 넘겨줬다.



"그러나  선택의 자유라는 무서운 짐이 인간을 억누를 때 그들은 당신에게 등을 돌리고, 당신의 모습에도 당신의 진리에도 등을 돌릴 것이라는 걸 당신은 정말로 생각해 본 적이 없소? 그들은 마침내 '진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다'고 외치게 되고 말거요. 왜냐하면 당신이 그처럼 많은 걱정과 풀 수 없는 과제를 그들에게 남김으로써 그들은 혼란과 고통속에서 허우적거리기도록 했기 때문이오. 아마 그보다 더 잔인한 일은 없을 거요." 
<카라마조프 형제들>중..

선택의 자유는 '인간의 무서운 짐'이라 대심문관은 단언한다. 예수는 사람들의 삶속에 개입하지 않고 그들이 선택하는 것을 존중한다. 그로인해 그리스도는 절대적인 존재지만, 사람들은 자신이 소유한 자유의지로 '진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다'라고 말한다. 그리스도는 절대적인 존재지만 인간들 앞에 왜 기적과, 신비와, 권위로 역사하지 않는 것인가? 대심문관은 이런 부조리한 현실에 대해 얘기한다


대심문관은 믿는 사람뿐만 아니라 그 외 다른 모든 인간에게도 안식을 줄 수 있는 사상에 대해 이야기한다.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들이 행하는 반란과 살인의 행위 또한 절대 권력으로 그들이 자유를 버리고 권위자에게 복종할때 자유롭게 될 것이라 말한다. 

그리스도는 아무 대답 없이 대심문관의 입에 입을 맞추었다. 결국 대심문관은 그리스도를 풀어주고 그 여운을 간직한체 자신의 이념을 고수하면서 살아간다. 이반은 '대심문관'을 통해 알료샤에게 모든걸 얘기한다. 듣고 있던 알료샤는 그런 이반의 사상을 이해 할 수 없지만 이반을 품어주며 그 둘은 각자 자신의 길로 향한다. 



조시마 장로를 통한 이야기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신비...

도스토옙스키는 혁명주의자들의 사상에 더 이상 동조하지 않았다. 논리와 이론과 완벽한 사상으로 구성된 혁명 속에는 바로 예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불합리와 고통으로 얼룩져 있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따른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인간의 삶을 상상할 수조차 없다. 아무리 훌륭한 진리와 부귀가 있다 해도 그것이 신앙에 위배된다면 나는 그리스도의 편에 설 것이다.” -도스토옙스키

<카라마조프 형제들>에서 만날 수 있는 수많은 등장인물들이 있다. 엄청난 량의 소설인 만큼 진행되는 여러 가지 이야기와 상황이 있다. <카라마조프 형제들>중에서 알료샤의 기록으로 남아있는 조시마 장로의 설교를 볼 수 있다. 조시마 장로는 사랑과 화합, 용서와 복음전파에 대해 이야기 한다. 조시마 장로에게는 형이 한명 있었는데 죽음을 앞에두고 조시마 장로의 형은 고난주간 동안 교회에 나가기 시작한다. 자신의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겠다는 마음가짐으로 나가기 시작했던 교회에서 그는 영적으로 회복되어 기쁨으로 죽음까지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여준다. 저주했던 가족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존재를 믿었을때 그에게 나타난 변화는 모두에게 놀라웠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통해서 구원과 죄 용서함을 받는 놀라운 사건을 여러 가지의 이야기로 표현하고 있다. 조시마 장로의 잊을 수 없는 조그마한 소년이 읽은 성경은 구약에서 나오는 인물 욥에 관한 것이다. 그는 정직하고 신앙심 깊은 사람 이였다. 또한 엄청난 부자였다. 아이들을 무척 사랑하여 하나님께 매일 기도드리는 사람 이였다. 어쩌면 아이들이 무슨 죄를 지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하나님께서 욥으로 인해 기뻐하시자 악마는 하나님께 거룩한 종도 하나님께 불평을 말하며 하나님을 저주하는 것을 보여주겠다고 하나님께 말한다. 하나님은 욥을 악마에게 맡기신다. 그러자 악마는 욥의 자식과 가축을 모두 죽인다. 또 온 몸에 종기로 욥은 돌을 가져다가 자신의 몸을 긁는다. "오오 주여, 주님은 내게 벌을 내리셨나이다. 그러나 주님의 이름이 영원히 찬송받을지니이다!" 욥의 이러한 고백을 가지고 조시마 장로는 이 이야기를 읽을 때 마다 위대하고 신비로운 헤아릴 수 없는 일들에 대해 감동의 눈물을 흘린다. 이해할 수 없는 부조리까지 은혜로 받아드릴 수 있는 신비는 도스토옙스키에게 큰 인상을 남겼다.


"순간적으로 나타났다 사라지는 땅위의 것이 영원한 진리와 하나가 되었다는 점에 위대함이 있는 것이다. 조물주는 천지창조의 며칠동안 매일 '내가 창조한 것은 선하도다' 찬탄하셨듯이 욥의 장한 모습을 보시고 다시금 자기의 창조물을 찬미하신 것이다. 그리고 욥이 하나님을 찬양한 것은 비단 하나님 한 분에 대한 봉사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창조물에 대한 봉사이기도 했다.그것은 그가 애초부터 그러한 사명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아, 이 얼마나 위대한 책이며 이 얼마나 위대한 교훈인가! 이성서란 얼마나 고마운 책이며 위대한 기적인가! 그리고 이 책은 인간에게 얼마나 큰 힘을 부여해 주는가!" 
<카라마조프 형제들>중...



죽음을 맞이한 일류샤와 그리고 다른 아이들 함께 울어주다...

도스토옙스키의 자녀 표도르와 류보비도스토옙스키의 자녀 표도르와 류보비

"삶의 기쁨 4분의 3은 아이들에게서 부터,

4분의 1은 일로 부터 탄생합니다!" -도스토옙스키

도스토옙스키는 집에 오면 바로 자신의 아이들을 찾았다고 한다. 도스토옙스키의 인생에서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은 매우 소중했고 너무 값진 시간이라고 한다. 도스토옙스키의 이런 아이들을 사랑했던 면이 <카라마조프 형제들>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도스토옙스키는 여러 아이들을 등장 시키는데 그중에 일류샤라는 아이가 있다. 도스토옙스키의 죽은 첫째 아들을 떠올리며 일류샤라는 아이를 그려냈다. 

다른 아이들에게 놀림을 받던 일류샤는 병에 걸리게 된다. 알료샤의 손에 이끌리어 일류샤를 놀리던 아이들은 일류샤에게 용서를 구한다이전에 콜랴라는 한 아이는 제일 먼저 일류샤와 용서를 구하게 된다. 콜랴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지혜롭고 명철한 아이로 등장한다.



<카라마조프 형제들>에서 아이들이 나누는 대화를 보면 대화의 형식에 심리적인 많은 설명을 덫 붙이지 않았다. 아이들의 마음에 있던 순수함에는 다른 숨은 의도가 없던 것일까? 아픈 일류샤를 진심으로 동정 하는 아이들은 일류샤 침대 곁에서 일류샤를 위로하고 함께 울었다. 일류샤가 기뻐서 웃는다면 아이들은 함께 기뻐 소리치고 손뼉을 친다. 아이들이 신나게 놀리던 일류샤를 이제는 다르게 대한다. 일류샤의 기쁨이 아이들 자신의 기쁨 이라는 것인가? 아이들의 계산 없는 순수한 모습을 만날 수 있다<카라마조프 형제들>의 마지막은 아이들과 함께하는 알료샤의 장면으로 소설을 마친다. 아이들은 모여서 일류샤의 죽음을 슬퍼하는데 콜랴의 모습이 유독 유난히 눈에 띈다.


"나는 슬퍼 죽겠어요. 만일 일류샤를 다시 살아나게 할 수만 있다면 

이 세상에 가진 걸 다 내놓아도 아깝지 않겠는데!" -<카라마조프 형제들> 중...


어린 나이의 콜랴는 친구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는 것일까? 다른 아이들은 하나둘씩 일류샤를 기억하기 위해 일류샤를 기념하는 바위를 정한다. 앞으로 장성하면서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이 사라지고 악한 마음이 생기더라도 일류샤를 기억하며 선량했던 때를 기억하자고 외친다. 일류샤의 죽음으로 아이들은 삶에서 큰 변화기를 겪는다. 일류샤가 과연 아이들에게 한 알의 밀알이 되었을까? 영원히 변하지 않는 사랑을 아이들을 통해 알료샤는 깨닫는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고린도전서 13장 11절 



<카라마조프 형제들>에서 만난 도스토옙스키...


<카라마조프 형제들>에서 만난 카라마조프 형제들과 카라마조프와 여러 인물과 상황과 사건을 통해 각기 다르게 느꼈을 것이다. 깊은 심리적인 묘사와 문체는 읽는 이로 하여금 흥미를 유발시켰을 것이다. 그의 마지막 소설이 된 <카라마조프 형제들>에서 '예수'를 배제하고 설명할 수 도 있다. 도스토옙스키의 사상은 많은 철학과 심리학에 영향을 주었다. 그렇다면 도스토옙스키의 사상과 믿음은 어디서부터 탄생했고, 무엇을 위해 글을 썼는가죽음의 문턱에서 은혜로 살았던 도스토옙스키의 삶의 경험은 신비하다.


 도스토옙스키도 '꼭 한번 희곡을 쓰고 싶다.'라고 했다. 하지만 희곡에서는 인물간의 심리적인 묘사는 배제되어 나온다. 도스토옙스키의 심리적인 묘사를 배제한 희곡은 어떨까?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을 연기한다면 배우는 이런 깊은 내적인 마음을 어떻게 연기해 낼까? 글 속에서 만난 도스토옙스키는 시간의 방향을 이리저리 뒤섞기도 하며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과 진리를 글로써 보여주었다. 도스토옙스키에게 진리란 무엇이었을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요한복음 14장 6절 


도스토옙스키가 이해하고 받아드렸던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였다. 어떻게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에서 '예수'를 배제하고 해석할 수 있을까? <카라마조프 형제들>에서는 다루기 매끄럽지 않은 종교적인 의미와 메세지가 함축 되어있다. 이로인해 많은 지식인들은 종교적인 메세지의 의미는 살짝 덮어둔체 해석하거나 서평하는 것을 많이 봤다. 종교적인 이야기를 빼고도 할 이야기는 끝없는 <카라마조프 형제들>이지만 도스토옙스키가 구현하고자 했던 열망 '그리스도'를 배제하고 작품을 받아드리기에는 아쉬운 작품이다. 


예술의 힘은 놀랍다. 하지만 잘못 사용 된다면 이성을 잃게 만들기 까지도 한다. <카라마조프 형제들>을 읽고 나면 기독교인들이 늘어날 수밖에 없지만 어떻게 된것일까? 도스토옙스키는 대심문관에서 확실하게 말했다. '선택의 자유'는 당신에게 주어져있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우리의 선택이다. <카라마조프 형제들>에서 영적인 세계를 만난 우리들에게 도스토옙스키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다이성의 철학과 부조리한 세상의 현실을 보면서 '그리스도'를 받아드릴지, 아니면 대심문관처럼 자신의 이념을 고수한 체 살아갈지 우리의 선택이다


"누군가 만약 그리스도가 진리와 상관없다고 우긴다면, 그리고 진리란 그리스도를 빼놓고도 가능하다고 우긴다면 나는 그리스도와 같이 있기를 선택할 것이요 진리와 함께 있기를 선택하지 않을 것이다." -도스토옙스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