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서평] <언어의 온도> "당신의 언어는 몇 도입니까?"

마뜨료쉬까 2021. 5. 12. 13:19

 

당신의 언어는 몇 도입니까?

내가 하는 말, 내가 쓰는 글에 대하여 오랜만에 깊이 생각해 봤다. 따뜻한 언어가 무엇인지, 내 행동과 내 글이 어떻게 타인에게 이해되고 보일지 깊이 관찰해 봤다. <언어의 온도>를 읽지 않았다면 내가 사용하는 언어에 대해 고심해보지 못했을 것이다. 한 챕터 한 챕터 읽을 때마다 이야기가 많았다. 유독 기억에 남았던 '그냥'에 대한 이야기다. 아버지가 오랜만에 딸에게 전화해서 "그냥, 생각나서 전화했지"라는 그 말 한마디에 담긴 그리움, 미안함, 사랑을 놓친다면 '그냥'은 아무 의미 없는 '그냥'일 뿐이다. 아버지는 바쁘다는 핑계로 어린 시절 딸과 함께 시간을 보내지 못했던 미안함과 더 잘해주고 싶은 부모의 마음이 담긴 '그냥'은 뜨겁고 절절하다. 표현하지 않으면 모르지만 아버지의 '그냥'은 최고의 애정 표현이었을 것이다. 

서론을 읽으며 내가 했던 말과 글을 되짚어봤다. 내 언어는 몇 도일까? 내가 인정하는 범위 안에 있는 사람이라면 언제나 따스한 말을 전했고, 내 기준에 부적합한 사람이라면 시선 조차 마주치지 않는 묵음으로 차갑게 행동했다. 이렇듯 내 언어는 내 마음을 정확하게 비추고 있었다. 온도계에 내 언어의 온도를 자동 24도로 설정하고 싶다. 따뜻하고 시원하기도 한 가장 기분 좋은 온도 말이다. 봄의 살랑거리는 바람처럼 기분 좋은 언어를 가지고 싶다. 내 말과 행동이 타인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언어를 가지면 좋겠다 생각했다. 읽는 내내 따스한 이야기에 마음이 뭉클해지기도 했다. 지나버린 삶에 대해 후회하는 편지를 읽으며 눈물이 고이기도 했다. 

 

조금 어색하기도 했던..

중간중간 이기주 작가의 정제된 표현중 오글오글 거리는 부분도 있었다. 소 챕터 중간중간 등장하시는 경비아저씨, 타이어 가게 직원 등 대화가 너무 철학적이었다. 서평과 리뷰를 살펴보니 다른 독자들도 이런 부분에 대하여 호불호가 갈리는 편이었다. 물론 어느 정도 다듬어진 글로 기록됐지만 비현실적인 부분이 있었다. 경비아저씨의 대답은 철학적인 현자가 말하는 것 같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경비 아저씨와 달랐다. 이외 친구들이 등장하거나 주변 할머니 할아버지가 손자와 이야기하는 부분에서도 손이 움츠려 드는 오글오글한 부분이 많았다. (그럼에도 충분히 공감되고 현실성 있는 부분도 많고, 이기주 작가의 언어에 대한 관찰과 깊은 생각이 잘 담긴 책이라 생각한다.)

 

내가 하는 말

내가 하는 언어는 어떨까? 다른 누군가에게 상처 준 적은 없었을까? 30대 이후 내 인생은 사회생활이 주가 되어 살아가고 있다. 나는 회사에서 전부 언어를 통해 소통한다. 거래처와 전화를 하고, 메일을 쓰고, 동료들과 점심을 먹으며 이야기한다. 내가 잘못 뱉은 말 한마디에 계약이 성사되기도 하고 미뤄지기도 하며 실패한 일이 잘 풀리기도 한다. 언어는 ‘나’ 자신과 동일한 성격을 가진 내 모습이다. 회사 생활중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 직원 건의함에 누군가 글을 올렸다. “야”, “너”, “니” 와 같은 호칭 대신 “OO님”과 같이 호칭을 통일하자는 사내 건의였다. 정확히 누구를 타깃으로 작성한 건의인지는 바로 알 수 있었다. 좁은 회사에서 모두가 듣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호칭은 나만 불쾌한 게 아니었다. 다른 동료들도 계속 불편했던 것이다. 그 이후 전사 메일이 날아왔다. “야”, “너”, “니” 와 같은 호칭 대신 “OO님”과 같이 사내 호칭 문화를 만들어 가자는 대표님의 메일이었다. 하지만 사람이 한 번에 바뀔 수 있을까? “야”라고 호칭하던 당사자에게 공지는 아무 소용없었다. 언제나 무시하는 듯한 뉘앙스로 “야”라고 아직도 부르고 있다. 그렇게 언어는 그 사람의 성품을 그대로 보여준다. 

 

 

나만의 글쓰기

나는 글쓰기를 좋아한다. 말하는 것보다 몇 번이고 다듬을 수 있기 때문이다. 글쓰기에 대한 이기주 작가의 정의가 참 마음에 든다. 고쳐 쓰는 형태의 ‘리라이팅’으로 온전한 글쓰기를 이뤄 가는 것이다. 글쓰기에 부족한 나로서는 매우 공감 가는 글이었다. 보통 나는 초벌을 쓰고, 고쳐 쓰고, 다시 고쳐 쓴다. 매번 느끼지만 문장을 다듬을 수록 어수룩한 문장은 깔끔하고 군더더기가 없다. 말은 뱉고 나면 수정할 수 없지만 글은 계속해서 수정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더군다나 수기로 기록하는 것이 아닌 컴퓨터 자판으로 입력하여 수정이 더욱 용이하다. 

나의 첫 글쓰기는 편지였다. 어버이날 이면 꼭 편지지와 카네이션을 어머니께 드리곤 했다. 초등학교 시절 어머니께 편지를 쓸 때 첫 말머리에 꼭 썼던 문장이 있었다. 어머니는 아직도 기억하고 종종 이야기하신다. “어머니 잘 지내시죠?”였다. 매일 함께 삼시세끼 먹고, 한 이불에서 같이 자고, 매일 보는 어머니에게 이 문장은 엉뚱했던 것 같다. 그래도 어머니는 내가 쓴 엉터리 편지를 소중히 간직하고 기억하신다. 당시 내가 무슨 생각으로 쓴 첫 말머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머니에게는 사랑의 편지로 자리매김했다. 

연애시절에도 글쓰기는 유용했다. 나는 긴 유학생활로 또래에 비해 경제적 독립 시기가 많이 늦었다. 그렇게 용돈이 부족하던 내가 비싼 선물 대신 공들인 것은 편지 쓰기였다. 이쁘고 분위기 있는 엽서를 사기 위해 인사동, 광화문의 큰 서점을 다니며 유니크한 엽서를 사모았다. 이쁜 엽서에 편지를 쓸 때면 A4용지에 미리 작성한 뒤 옮겨 적었다. 한 땀 한 땀 정성 들여 편지를 쓰는데 최소 1~2시간은 사용한 것 같다. 멋진 문장이 부족할 때면 성경구절, 명언집을 펴고 필사한 뒤 그 의미를 함께 풀어 사랑 고백을 기록했다. 편지밖에 선물하지 못하기도 하여 여자 친구에게 미안했지만 그래도 밝은 모습으로 기뻐해 주던 여자 친구가 참 고마웠다. 멋진 글이 아니었지만 항상 내 편지를 기다리고 사랑해 주는 모습에 내가 더 감동했던 것 같다. (편지 덕분인지 몰라도 여자 친구는 지금 아내가 되었다)

“딸에게 보내는 굿나잇 키스”를 읽는 내내 코끝이 찡했다. 자신보다 먼저 하늘나라에 간 딸에게 쓴 편지였다. 수신인 조차 없는 편지에 아버지의 마음 전부가 담겨 있었다. 미안함과 후회, 보고 싶은 마음을 담은 그 편지를 읽으니 길지 않은 문장에도 마음이 울컥했다. 누군가의 글이 나의 마음과 생각과 가치관을 건드린다. 흰 여백에 쓰인 글자에 모든 것이 담겨 있다. 이러하듯 언어의 수단 중 글쓰기는 인류 최고의 표현 수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